빌립의 복음
히브리인은 다른 히브리인을 만들고, 그런 사람을 “개종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개종자는 다른 개종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 그들이 […]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노예는 자유롭기만을 추구하지만, 주인의 재산을 얻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상속 재산을 요구합니다. 죽은 자의 상속자는 그들 자신이 죽었고, 그들은 죽은 자를 상속받습니다. 살아있는 것의 상속자는 살아 있고, 그들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모두의 상속자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상속받지 못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상속받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있는 것을 상속받으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지만, 죽은 자는 더욱 살 것입니다.
이방인은 죽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죽기 위하여 산 적이 없음이니라. 진리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었고, 이 사람은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느니라, 이는 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래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성읍들이 장식되었고, 죽은 자들이 옮겨졌느니라. 우리가 히브리인이었을 때는 고아였고 어머니만 있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가졌느니라.
겨울에 씨 뿌리는 자는 여름에 거둔다. 겨울은 세상이고 여름은 다른 에온(영원한 영역)이다. 우리가 여름에 거둘 수 있도록 세상에 씨 뿌리자. 그러므로 우리가 겨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여름은 겨울을 따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겨울에 거둔다면 그는 실제로 거둔 것이 아니라 뽑아낼 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사람에게 추수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 나올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도 […] 불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고,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어떤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낯선 사람들을 구속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담보로 주신 사람들을 따로 두셨습니다. 그가 나타나셨을 때만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생겨난 그날부터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담보로 주어진 것을 취하기 위해 먼저 오셨습니다. 그것은 강도의 손에 넘어갔고 포로가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구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모두 구속하셨습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오른쪽과 왼쪽은 서로 형제입니다. 그들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선은 선이 아니고 악은 악이 아니며,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각각은 가장 오래된 기원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위로 높여진 자들은 분리될 수 없고 영원합니다.
세속적인 것에 붙인 이름들은 매우 기만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생각을 올바른 것에서 잘못된 것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듣는 사람은 올바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인식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생명”과 “빛”과 “부활”과 “교회(에클레시아)”와 그 외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인식합니다. 그들이 올바른 것을 알게 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들리는 이름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 속입니다. 그것들이 에온(영원한 영역)에 있다면, 그것들은 결코 세상에서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세상적인 것들 사이에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에온에서 끝을 맺습니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이름이다. 그것은 모든 것 위에 있는 이름이다. 아버지의 이름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쓰지 않고는 아버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름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지 않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위해 세상에 이름을 존재하게 했습니다.이 이름들이 없이는 그것(진리)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진리는 하나의 것입니다.그것은 많은 것이고, 우리를 위해 많은 것들을 통해 사랑으로 이 한 가지에 대해 가르치는 것입니다.통치자들(아르콘들)은 인간을 속이고자 했습니다.그들은 인간이 참으로 선한 자들과 친족 관계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선한 자들의 이름을 빼앗아 선하지 않은 자들에게 주었고, 그것은 이름들을 통해 그를 속이고 그들을 선하지 않은 자들과 묶기 위해서였습니다.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들에게 얼마나 은혜를 베푸는지요!그들은 그들을 선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떼어내어 선한 자들 사이에 두었습니다.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인을 빼앗아 영원히 자기들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지 아니하고 […] 하는 권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어떤 희생도 […] 없을 것이고 동물도 권세들에게 바쳐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물들은 그들이 희생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들을 살아서 바쳤지만, 그들이 그들을 바쳤을 때, 그들은 죽었습니다. 사람에 관해서는, 그들은 그를 죽은 채로 하나님께 바쳤고, 그는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세상에 빵이 없었습니다. 마치 아담이 있던 낙원에 동물을 기르는 나무는 많았지만 사람을 부양할 밀은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동물처럼 먹어야 했지만, 완전한 사람인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는 사람이 사람의 음식으로 기르도록 하늘에서 빵을 가져왔습니다. 통치자들은 자기들의 힘과 의지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성령께서 비밀리에 그들을 통해 모든 것을 원하시는 대로 이루셨습니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진리는 어디에나 뿌려집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것이 뿌려지는 것을 보지만, 그것이 거두어지는 것을 보는 사람은 적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언제 여자가 여자를 통해 잉태한 적이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어떤 권세도 더럽히지 않은 처녀입니다. 그녀는 사도들이자 사도적 인간인 히브리인들에게 큰 저주입니다. 어떤 권세도 더럽히지 않은 이 처녀는 […] 권세들이 스스로를 더럽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른 아버지가 없었다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마태복음 16:17). 그는 단순히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모든 집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져오십시오.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가지 마십시오.”
“예수”는 숨겨진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계시된 이름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어떤 언어에도 특별한 이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항상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리스도”는 시리아어로 “메시아”이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확실히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에 따라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든 천사든 신비든 아버지든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죽으셨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자들은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부활하셨고 (그리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는 […] 할 것입니다.
아무도 큰 물건 속에 큰 귀중한 물건을 숨기지 않겠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한 푼어치의 물건에 셀 수 없이 많은 물건을 던져 넣었습니다. 영혼을 비교해 보세요. 그것은 소중한 것이고, 그것은 경멸스러운 몸 속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일어날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으로 일어나기를 원하지만, 벌거벗은 자들이 육신을 입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벌거벗은 자들은 옷을 벗는 자들입니다. “혈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15:50).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업으로 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과 그의 피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살은 말씀이고 그의 피는 성령입니다. 이것들을 받은 자는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둘 다 잘못입니다. 당신은 육신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날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공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육신 속의 영이라고 말하고, 그것은 또한 육신 속의 이 빛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육신에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무엇을 말하든 육신 밖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으로 일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육신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옷을 입는 사람이 옷보다 낫습니다. 천국에서는 옷이 입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물과 불을 통해서 온 장소가 정화됩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에 의해, 숨겨진 것은 숨겨진 것에 의해.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숨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물 속에 물이 있고, 성유 속에 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은밀히 데려가셨는데,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위대한 자에게는 위대한 자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작은 자에게는 작은 자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천사들에게는 천사로 나타났고, 사람들에게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서 숨겨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산에서 영광 가운데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작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대해졌지만, 그는 제자들을 위대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그의 위대함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그날 감사 기도에서 “완전한 빛을 성령과 합하신 당신, 천사들을 우리와 합하여 형상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양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어린양이 없으면 왕을 볼 수 없습니다. 왕이 벌거벗은 상태라면 아무도 왕에게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천상의 사람은 지상의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들이 많더라도 죽는다면, 죽지 않고 항상 태어나는 완전한 사람의 아들들은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만드시고 아들은 아들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태어난 자는 낳을 능력이 없고, 아들은 아들을 얻지 않고 형제를 얻습니다. 세상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사람은 하늘의 장소에 약속된 것에서 영양을 받습니다. […] 입에서. 그리고 말씀이 그곳에서 나갔다면, 입에서 영양을 공급받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입맞춤으로 잉태하고 출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서로 입맞춤합니다. 우리는 서로 안에 있는 은혜로 잉태됩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걸었던 사람은 세 명이었습니다. 마리아, 그의 어머니, 그녀의 자매, 그리고 그의 동반자라고 불린 막달레나였습니다. 그의 자매와 그의 어머니, 그의 동반자는 모두 마리아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단일한 이름입니다. “성령”은 이중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에 있고,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은 숨겨진 것에 있고, 계시된 것에 있습니다. 성령은 계시된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것은 숨겨진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 있습니다.
성인들은 사악한 권세에 의해 섬김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에 의해 눈이 멀어서 성인들을 위해 그렇게 할 때마다 (평범한) 사람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어느 날 한 제자가 주님께 이 세상의 무언가를 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께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의 것을 줄 것입니다.”
사도들은 제자들에게 “우리의 모든 제물이 소금을 얻기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소피아를 “소금”이라고 불렀습니다. 소금이 없다면 어떤 제물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피아는 불임이고 아이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소금의 흔적”이라고 불립니다. 그들이 제멋대로 […] 하려는 곳이면 어디든 성령은 […],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은 많습니다.
아버지가 소유한 것은 아들의 소유이고, 아들 자신은 아직 어린 동안은 자기 소유를 맡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어른이 되면, 그의 아버지는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그에게 준다.
길을 잃은 자들, 영이 낳은 자들은 대개 영 때문에 길을 잃는다. 그러므로 한 번의 호흡으로 불은 타오르고 꺼진다.
에카모스는 한 가지이고 에크모스는 다른 것입니다. 에카모스는 단순히 지혜이지만, 에크모스는 죽음의 지혜이며, 죽음을 아는 자, 즉 “작은 지혜”라고 불립니다.
가축에는 황소와 당나귀와 같은 가축이 있고, 다른 가축은 야생이며 사막에서 따로 산다. 사람은 가축을 통해 밭을 갈고, 그것으로 자신과 길들인 동물이나 야생 동물을 양육한다. 완전한 사람을 비교해 보라. 그는 복종하는 권능을 통해 밭을 갈고, 모든 것이 생겨나도록 준비한다. 선이든 악이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온 장소가 서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사람을 돌보고, 모든 권능, “길들인” 권능과 “야생” 권능, 그리고 독특한 권능을 다스린다. 사실 그는 […] 그들을 가두어 […] 그들이 원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창조된 자는 아름답지만, 당신은 그의 아들들이 고귀한 창조물임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창조되지 않고 태어났다면, 당신은 그의 씨앗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창조되었고 (그리고) 그는 낳았습니다. 이 고귀함은 무엇입니까? 먼저 간음이 있었고, 그 후에 살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뱀의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살인자가 되었고, 그는 그의 형제를 죽였습니다. 실제로,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성행위는 간음입니다.
신은 염색하는 사람입니다. “진짜”라고 불리는 좋은 염색약이 염색된 것과 함께 사라지듯이, 신이 염색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염색약은 불멸이므로 그의 색깔을 통해 불멸이 됩니다. 이제 신은 자신이 담근 것을 물에 담그십니다.
누구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보려면 그것들과 같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는 태양이 아닌 채로 태양을 보고, 하늘과 땅과 다른 모든 것들을 보지만, 그는 이러한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과 매우 일치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장소의 어떤 것을 보고, 당신은 그러한 것들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영을 보고, 당신은 영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보고, 당신은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를 보고, 당신은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곳에서 모든 것을 보고 당신 자신을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받고, 사랑은 줍니다. 아무도 믿음 없이는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사랑 없이는 줄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참으로 받기 위해 믿고, 사랑하기 위해 줍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 주는 사람은 준 것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받은 사람은 여전히 히브리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있었던 사도들은 그에게 “예수, 나사렛 사람, 메시아”, 즉 “예수, 나사렛 사람,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지막 이름은 “그리스도”이고, 첫 번째 이름은 “예수”이고, 가운데 있는 것은 “나사렛 사람”입니다. “메시아”는 “그리스도”와 “측정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예수”는 “구원”입니다. “나사렛 사람”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사람”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 측정되었습니다. “나사렛 사람”과 “예수”는 측정된 자들입니다.
진주가 진흙 속에 던져지면 크게 멸시를 받고, 발삼 기름을 바르더라도 더 귀중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주인의 눈에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비교해 보세요.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눈에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네가 “나는 유대인이다”라고 하면 아무도 움직이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네가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하면 아무도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네가 “나는 그리스인, 야만인, 노예, 자유인이다”라고 하면 아무도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네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하면 […]가 떨 것이다. 내가 그렇게 […] 되기를 바란다 –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 듣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신은 사람을 먹는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에게 제물로 바쳐집니다. 사람들이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왜냐하면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은 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리 디캔터와 토기 단지는 모두 불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유리 디캔터가 깨지면 다시 만들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호흡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기 단지가 깨지면 파괴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호흡 없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맷돌을 돌리는 당나귀는 백 마일을 걸었다. 풀려났을 때, 그것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음을 알았다. 많은 여행을 하지만 어떤 목적지에도 진전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저녁이 되어도 그들은 도시도 마을도, 인간의 유물도 자연 현상도, 권능도 천사도 보지 못했다. 불쌍한 자들은 헛되이 수고했다.
성찬례는 예수입니다. 그는 시리아어로 “바리사타”라고 불리며, 이는 “펼쳐진 자”를 뜻합니다. 예수는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레위의 염색 공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72가지 다른 색깔을 가져다가 통에 던졌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흰색으로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와 같이 인자도 염색공으로 왔습니다.”
지혜는 “불임”이라고 불리며, 천사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 막달라 마리아의 동반자입니다. […]는 그녀를 모든 제자보다 더 사랑했고, 그녀의 입술에 자주 키스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 그들은 그에게 “당신은 왜 그녀를 우리 모두보다 더 사랑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구세주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왜 그녀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눈먼 사람과 보는 사람이 어둠 속에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빛이 오면 보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고, 눈먼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물 것입니다.”
주님은 “존재하기 전에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존재하는 자는 있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우월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보다 강하고 명백한 것과 숨겨진 것의 측면에서 위대한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들과 분리되면,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먹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땅을 경작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물속으로 내려가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올라와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자를 받고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받는다면 그는 그 이름을 선물로 받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돌려줄 필요가 없지만 이자를 받고 빌린 사람에게는 지불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그가 신비를 경험할 때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결혼의 신비는 위대합니다! 결혼이 없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존재는 […]이고, […] 결혼의 존재는 […]입니다. […]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미지는 더럽혀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악령의 형상에는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남성은 여성 형상에 거주하는 영혼과 결합하는 자이지만 여성은 남성 형상에 있는 자들과 섞인 자입니다. 비록 그가 불순종한 자였지만요.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성의 힘이나 여성의 힘, 신랑과 신부를 받지 않으면 그를 붙잡아두기 때문입니다. 거울로 된 신방에서 그들을 받습니다. 음탕한 여자들이 남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에게 뛰어들어 그와 놀고 그를 더럽힙니다. 마찬가지로 음탕한 남자들도 아름다운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녀를 설득하고 강요하여 그녀를 더럽히고자 합니다. 그러나 남자와 그의 아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여자는 남자에게 들어갈 수 없고 남자는 여자에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형상과 천사가 서로 결합되어 있다면 아무도 남자나 여자에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에 있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구금될 수 없는 자는 분명히 […]의 욕망과 두려움 위에 있습니다. 그는 […]의 주인입니다. 그는 시기심보다 우월합니다. […]가 오면 그들은 그를 붙잡아 목을 조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떻게 위대한 […] 권세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신실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더러운 영들과 귀신들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성령이 있었더라면 더러운 영이 그들에게 붙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두려워하면 그것이 당신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하면 그것이 당신을 삼키고 마비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 거하거나 부활에 거하거나 중간에 거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거기에 발견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그 좋은 것들은 선이 아니고, 그 악한 것들은 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이후에는 참으로 악한 악이 있습니다. “중간”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부활을 얻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육신을 벗어던졌을 때 안식 가운데 발견되고 중간에서 걷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길에서 길을 잃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럴 의지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의지가 있어도 이익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지 않는다면, 두 경우 모두 정의는 그들을 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행동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도는 환상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불의 집에 갇혀 불타는 […]로 묶인 채 […] 불타오르는 […]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 믿음으로 […]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 어둠’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 했기 때문입니다.”
물과 불에서 영혼과 영이 생겨났습니다. 물과 불과 빛에서 신방의 아들이 생겨났습니다. 불은 성유이고 빛은 불입니다. 형태가 없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하얗고 밝고 아름다우며 아름다움을 주는 다른 불을 말합니다.
진리는 벌거벗은 채로 세상에 오지 않았지만, 예표와 형상으로 왔다.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거듭남과 거듭남의 형상이 있다. 형상을 통해 거듭나는 것이 확실히 필요하다. 어느 것인가? 부활이다. 형상은 형상을 통해 다시 일어나야 한다. 신방과 형상은 형상을 통해 진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회복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내놓는 자들은 그렇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 그것들을 내놓았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들을 얻지 못한다면, 그 이름(“그리스도인”)도 그에게서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십자가의 권능의 […] 기름부음을 받는다. 사도들은 이 권능을 “오른쪽과 왼쪽”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신비 속에서 행하셨고, 세례와 성유와 성찬례와 구속과 신방을 행하셨습니다. […]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래에 있는 것들을 위에 있는 것들과 같이 만들고, 밖에 있는 것들을 안에 있는 것들과 같이 만들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그 장소에서 하나로 합치기 위해 왔습니다.” […] 여기서는 예표와 이미지를 통해 […]
“하늘에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위에 한 분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하늘의 사람 중 첫 번째, 곧 나타난 자를 “아래에 있는 자”라고 부르고, 숨겨진 자는 그 위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면과 외면, 그리고 외면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은 멸망을 “외면의 어둠”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밖에는 다른 어둠이 없습니다. 그는 “은밀한 곳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네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들 모두 안에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안에 있는 것은 충만함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그 안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그들 위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왔고,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는 들어간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고, 그는 나간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브가 아담과 함께 있을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아담과 분리되었을 때 죽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들어와서 이전의 자아를 얻는다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34).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그분은 그곳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에게서 […]하신 이를 통하여 나신 이시니라.
죽음에서 나온 […]. […]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 완벽합니다. […] 육신이지만 이 […]는 참된 육신입니다. […]는 참되지 않지만 […]는 단지 참된 것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신방은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며, 노예를 위한 것도 아니며, 더럽혀진 여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곳은 자유민과 처녀를 위한 곳이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났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두 가지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빛 없이 물이나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거울이나 물 없이 빛 속에서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빛과 물, 두 가지로 세례를 주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제 빛은 성유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특별히 희생을 위한 건물이 세 개 있었습니다. 서쪽을 향한 건물은 “성소”라고 불렸습니다. 남쪽을 향한 또 다른 건물은 “성소 중의 성소”라고 불렸습니다. 동쪽을 향한 세 번째 건물은 “지성소 중의 성소”라고 불렸는데,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곳이었습니다. 세례는 “성소” 건물입니다. 구속은 “성소 중의 성소”입니다. “지성소 중의 성소”는 신방입니다. 세례에는 부활과 구속이 포함됩니다. 구속은 신방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방은 […]보다 더 뛰어난 곳에 있습니다. […] 기도하는 자들은 […] 예루살렘, […] 예루살렘, […] “지성소 중의 성소”라고 불리는 자들은 […] 휘장이 찢어졌고, […] 신방은 위에 있는 형상을 제외하고는 […] 이 때문에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권능은 완벽한 빛으로 옷을 입은 자들을 보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을 붙잡아둘 수 없습니다. 사람은 연합에서 성사적으로 이 빛으로 자신을 옷입을 것입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남자와 함께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헤어짐은 죽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있었던 헤어짐을 회복하고, 다시 두 사람을 합치고, 헤어짐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합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신방에서 남편과 합쳤습니다. 참으로, 신방에서 합친 사람들은 더 이상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와는 아담과 헤어졌습니다. 그녀가 그와 합친 것이 신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영혼은 숨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의 영혼의 파트너는 영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의 영혼은 그에게서 빼앗겨지고 영으로 대체되었다. 그가 (영과) 합일되었을 때, 그는 권능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들은 그를 부러워했다 […] 영적 파트너 […] 숨겨진 […] 기회 […] 그들만을 위해 […] 신방, 그래서 […].
예수가 나타났다 […] 요르단 – 천국의 왕국의 충만함. 모든 것보다 먼저 태어난 그는 다시 태어났다. 한 번 기름부음을 받은 그는 다시 기름부음을 받았다. 구원받은 그는 다시 (다른 사람들) 구원받았다.
참으로, 우리는 신비를 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아버지께서 내려오신 처녀와 연합하셨고, 그날 불이 그를 위해 비쳤습니다. 그는 큰 신방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은 바로 그날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랑과 신부에게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신방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을 통해 모든 것을 그 안에 확립하셨습니다. 제자들 각자가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합니다.
아담은 두 처녀에게서, 영에게서, 그리고 처녀 땅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태초에 일어난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낙원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을 낳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낳습니다. 아담은 동물을 낳은 나무에서 먹었습니다. 그는 동물이 되었고 동물을 낳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담의 자녀들은 동물을 숭배합니다. 나무의 […] 열매가 […] 늘어났습니다. […]는 […]의 […] 열매를 먹었고, […] 사람을 낳고, […] 사람을 낳습니다. […] 신이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 사람들이 신을 창조합니다. 세상은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만들고 그들의 창조물을 숭배합니다. 신들이 사람들을 숭배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분명 사람이 무엇을 성취하는지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사람의 성취를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성취 중에는 그의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그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만, 이 편안함은 자식들에게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이미지에 직접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진 사람이 자신의 육체적 힘으로 일을 성취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편안하게 낳습니다.
이 세상에서 노예는 자유인에게 봉사합니다. 천국에서 자유인은 노예에게 봉사합니다. 신방의 아이들은 결혼한 아이들에게 봉사할 것입니다. 신방의 아이들은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휴식입니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다른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 영광의 것들에 […] 많습니다.
[…] 자들은 물 속으로 내려간다. […] (물에서) […] 그들은 그것을 거룩하게 할 것이다. […] 그의 이름으로 […]를 가진 자들이. 그는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모든 의를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3:15)
먼저 죽고 나서 부활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을 먼저 받지 않으면 죽을 때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에 대해 말할 때도 “세례는 위대한 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빌립은 “목수 요셉은 자신의 직업에 필요한 나무가 필요해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심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든 것은 바로 그였습니다. 그의 자손은 그가 심은 것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의 자손은 예수였고, 심은 것은 십자가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정원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름을 얻은 것은 올리브나무에서이고, 기름에서 부활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은 시체를 먹는 자입니다. 그 안에서 먹히는 모든 것 역시 죽습니다. 진리는 생명을 먹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양육된 사람은 아무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음식을 가져오신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생명을 주셨고, 그들이 죽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신 […] 정원. 인간 […] 정원. 신의 […]와 […]가 있습니다. […] […] 안에 있는 것들을 나는 원합니다. 이 정원은 그들이 나에게 “[…] 이것을 먹거나 저것을 먹지 말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할 곳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먹을 곳에 지식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을 죽였지만 여기서 지식의 나무는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율법은 나무였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악에서 떼어내지 않았고, 그를 선에 두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먹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창조했습니다. 그가 “이것을 먹고, 저것을 먹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죽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유는 세례보다 우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성유”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지 “세례”라는 단어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을 가진 것도 성유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아들께서 사도들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사도들이 우리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그는 부활, 빛, 십자가, 성령을 소유합니다. 아버지께서 신방에서 그에게 이것을 주셨고, 그는 그저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셨습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주님께서 잘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웃으며 천국에 들어갔고, 그들은 나왔습니다 […] 왜냐하면 […] 그리스도인이 […]. 그리고 […]가 물속으로 내려가자마자 그는 […] 모든 것(이 세상의)을 가지고 왔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 사소한 일이었지만 […] 이 […] 천국을 경멸로 가득 채웠습니다 […] 만약 그가 […]를 멸시하고 사소한 일로 멸시한다면, […] 웃으며 나옵니다. 빵과 잔과 기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세상은 실수로 생겨났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사람은 그것을 불멸하고 불멸로 창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불멸이 아니었고, 세상을 만든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물은 불멸이 아니라 아들은 불멸입니다. 아들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불멸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더 줄 수 없겠습니까?
기도의 잔에는 포도주와 물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감사를 드리는 피의 유형으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은 온전히 완전한 사람에게 속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마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완전한 사람을 받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물은 몸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입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물속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그는 살아있는 사람을 입기 위해 옷을 벗습니다.
말은 말을 낳고, 사람은 사람을 낳고, 신은 신을 낳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비교해 보세요. 그들은 […]에서 왔습니다. 유대인은 […]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에게서 […]. 그리스도인은 […] 이 […]를 “선민 […]”과 “진정한 사람”과 “인자”와 “인자의 씨”라고 부릅니다. 이 진정한 종족은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 신방의 아들들이 거주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결합은 남편과 아내의 결합입니다. 약함으로 보완된 힘의 경우(?)입니다. 에온(영원한 영역)에서는 결합의 형태가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이름보다 우월하고 강한 것보다 강합니다. 왜냐하면 힘이 과시되는 곳에는 힘이 뛰어난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별개의 것들이 아니라 둘 다 하나의 단일한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마음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 필요가 없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즐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을 붙잡아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본다면 그를 붙잡아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자질을 얻는 다른 방법은 완전한 빛을 입고 그 자신도 완전한 빛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입은 사람은 […]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 떠나기 전에 […] 되는 완전한 […]입니다. 모든 것을 받는 사람은 여기 […]에서 […] 할 수 있지만 중간은 불완전한 것으로 […]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사람의 종말을 압니다.
사제는 그의 몸까지도 온전히 거룩합니다. 그가 빵을 가져갔다면 그는 그것을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또는 그가 받은 잔이나 다른 무엇이든 그는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의 몸도 거룩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세례의 물을 완전케 하심으로써 죽음에서 그것을 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 속으로 내려가지만 죽음 속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으로 부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영이 불면 겨울이 옵니다. 성령이 호흡하면 여름이 옵니다.
진리를 아는 자는 자유인이지만, 자유인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요 8:34). 진리는 어머니이고 지식은 아버지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자유롭다”고 불립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자유롭게 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그들에게 온 세상에 대한 우월감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세워줍니다”(고전 8:1). 사실, 지식을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는 아직 지식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노예입니다. 지식은 그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합니다. 사랑은 결코 어떤 것을 자기 것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 그것은 […] 소유합니다 […]. 그것은 결코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또는 “이것은 내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랑은 포도주와 향기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기름부은 모든 사람은 그것을 즐깁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있는 동안,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향기로부터) 이익을 얻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그들에게서 물러나면,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자들, 그저 근처에 서 있는 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악취 속에 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포도주와 기름만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기름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습니다”(1베드로 4:8).
여자가 낳는 아이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와 닮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면, 그들은 그녀의 남편과 닮았습니다. 만약 간통한 남자라면, 그들은 간통한 남자와 닮았습니다. 종종, 만약 여자가 그녀의 남편과 부득이하게 자고, 그녀의 마음은 평소에 성관계를 갖는 간통한 남자와 함께 있는데, 그녀가 낳을 아이는 간통한 남자와 비슷하게 태어납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사는 여러분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낳을 아이들이 세상을 닮지 않고 주님을 닮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인간과 교제한다. 말은 말과 교제하고, 당나귀는 당나귀와 교제한다. 한 종족의 구성원은 보통 같은 종족의 구성원과 어울린다. 그래서 영은 영과 섞이고, 생각은 생각과 어울리고, 빛은 빛과 공유한다. 당신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당신을 사랑할 사람은 인간이다. 당신이 영이 되었다면, 당신과 결합할 것은 영이다. 당신이 생각이 되었다면, 당신과 섞일 것은 생각이다. 당신이 빛이 되었다면, 당신과 공유할 것은 빛이다. 당신이 위에 속한 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면, 당신 위에 쉴 것은 위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당신이 말이나 당나귀나 황소나 개나 양이나, 바깥이나 아래에 있는 다른 동물이 되었다면, 인간도 영도 생각도 빛도 당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위에 속한 자들, 안에 속한 자들 모두 당신 안에서 쉴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은 그들에게 아무런 몫도 없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노예가 된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의 호의로 자유로워진 사람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다면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농사에는 네 가지 필수 요소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수확물은 물, 흙, 바람, 빛의 자연스러운 작용의 결과로만 헛간에 모아집니다. 하나님의 농사에도 마찬가지로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지식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흙이며, 우리가 뿌리를 내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우리가 영양을 공급받는 물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자라는 바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우리가 익는 빛입니다. 은혜는 네 가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천상적입니다. […] 가장 높은 천국입니다. […] […] 안에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 어떤 경우에도 영혼을 […] 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니라.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라. 그는 온 땅에 오셨고 아무에게도 짐을 지우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온전한 사람이시니라. 말씀은 이런 종류는 정의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이같이 큰 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 그는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주겠느냐? 무엇보다도, 크든 작든, 믿지 아니하든 믿는 하든, 누구에게나 괴로움을 주고 선행에 만족을 얻는 자에게만 위로를 주는 것은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어떤 사람들은 잘 된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이롭다고 여기느니라. 선행을 행하는 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없나니,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는 괴로움을 줄 수 없나니, 그는 그들을 괴롭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물론 잘 된 사람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나니, 그럴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괴로움에 대한 책임이 그들 자신의 사악함에 있기 때문이니라. (완벽한 사람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선한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몹시 괴로워합니다.
어떤 집주인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아들이든 노예든 가축이든 개든 돼지든 옥수수든 보리든 겨든 풀이든 […] 고기든 도토리든.이제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고, 그는 각자의 음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그는 아이들에게 빵을 […] 제공했습니다.그는 노예들에게 […]와 식사를 제공했습니다.그리고 그는 가축에게 보리와 겨와 풀을 던졌습니다.그는 개에게 뼈를 던졌고, 돼지에게 도토리와 찌꺼기를 던졌습니다.하나님의 제자를 비교해 보세요.만약 그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는 제자됨이 무엇인지 이해합니다.육체적 형태는 그를 속이지 않을 것이지만, 그는 각자의 영혼의 상태를 보고 그와 이야기할 것입니다.세상에는 인간의 형태를 한 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그가 그것들을 식별하면, 돼지에게는 도토리를 던지고, 가축에게는 보리와 겨와 풀을 던지고, 개에게는 뼈를 던질 것입니다. 그는 노예들에게는 기본적인 수업만 가르치고, 아이들에게는 완전한 교육을 가르칠 것이다.
인자가 있고 인자의 아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자이고 인자의 아들은 인자를 통하여 창조하는 자입니다.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하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낳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하는 능력을 받은 자는 피조물입니다. 낳는 능력을 받은 자는 자손입니다. 창조하는 자는 낳을 수 없습니다. 낳는 자는 또한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창조하는 자는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소위 “자손”은 단지 피조물일 뿐입니다. 출생의 […] 때문에 그들은 그의 자손이 아니라 […]입니다. 창조하는 자는 공개적으로 일하며 그 자신은 보입니다. 낳는 자는 비밀리에 낳으며 그 자신은 숨겨져 있습니다. […]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조하는 자는 공개적으로 창조합니다. 그러나 낳는 자는 비밀리에 자녀를 낳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언제 성관계를 갖는지 아는 사람은 그 둘뿐입니다. 사실, 세상에서의 결혼은 아내를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신비입니다. 결혼에 숨겨진 더러움의 속성이 있다면, 더럽혀지지 않은 결혼은 얼마나 더 진정한 신비입니까! 그것은 육체적이지 않고 순수합니다. 그것은 욕망에 속하지 않고 의지에 속합니다. 그것은 어둠이나 밤에 속하지 않고 낮과 빛에 속합니다. 결혼이 대중에게 공개된다면 그것은 매춘이 되었고, 신부는 다른 남자에게 임신했을 때뿐만 아니라 침실에서 빠져나와 사람들에게 보일 때에도 창녀 노릇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자신을 보이고, 신랑의 친구와 신랑의 아들들에게만 보이십시오. 이들은 매일 신방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기름을 즐기기를 갈망하고, 개처럼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먹게 하십시오. 신랑과 신부는 신방에 속한다. 아무도 신랑이 신부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없으니, 그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 한은.
아브라함은 자기가 볼 것을 보려고 했을 때 포피의 살을 할례했는데, 이것은 살을 파괴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대부분 것들은 그 속이 감추어져 있는 한 똑바로 서 있고 살아 있습니다. 드러나면 죽습니다. 보이는 사람이 보여 주는 바와 같습니다. 사람의 창자가 감추어져 있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창자가 드러나서 그에게서 나오면 그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가 감추어져 있는 동안 싹이 트고 자랍니다. 뿌리가 드러나면 나무는 말라 버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숨겨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뿌리가 감추어져 있는 한 그것은 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알려지면 그것은 녹아 버립니다. 그것이 드러나면 그것은 죽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마태복음 3:10). 그것은 단순히 베어지는 것이 아니라 – 베어진 것은 다시 싹이 틔웁니다 – 도끼는 깊이 파고들어 뿌리를 돋아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온 곳의 뿌리를 뽑아내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뽑았습니다. 우리 자신에 관해서는, 우리 각자가 자신 안에 있는 악의 뿌리를 파고들어서, 자신의 마음에서 뿌리부터 뽑아내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뽑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우리 마음에서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는 그것의 노예이다. 그것은 우리를 포로로 잡아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력하다. 그것이 존재하는 동안은 활동적이다. 무지는 모든 악의 어머니이다. 무지는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무지에서 나온 자들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 완전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은 무지와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숨겨져 있는 동안은 그 자체 안에 있지만, 그것이 드러나고 인식되면 무지와 오류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칭찬받는다. 그것은 자유를 준다. 말씀은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지는 노예입니다. 지식은 자유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진리의 열매를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결합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충만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창조의 명백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높이 존경받는 강한 자는 위대한 사람들이고, 멸시받는 약한 자는 모호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명백한 것들을 대조해 보세요. 그것은 약하고 멸시받는 반면, 숨겨진 것들은 강하고 높이 존경받습니다. 진리의 신비는 유형과 이미지로 드러나지만, 신방은 숨겨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성소 안의 성소입니다. 휘장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어떻게 통제하시는지 숨겼지만, 휘장이 찢어지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면, 이 집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파괴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열등한) 신격은 여기서 도망칠 것이지만, 지성소의 지성소로는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섞이지 않은 빛과 흠 없는 충만함과 섞일 수 없고, 십자가의 날개 아래와 그 팔 아래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방주는 물의 홍수가 그들 위로 밀려올 때 그들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들이 제사장의 반차에 속한다면, 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휘장은 위에서만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래에서만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드러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래의 것들을 열어 주어 우리가 진리의 비밀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이고, (그리고)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은 예표와 약함의 형상을 통해 거기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들은 완전한 영광과 비교하면 참으로 낮습니다. 영광을 능가하는 영광이 있습니다. 권능을 능가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들이 우리에게 열렸고, 진리의 숨겨진 것들도 열렸습니다. 지성소가 드러났고, 신방이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악은 감추어져 있는 한 효과가 없지만 성령의 씨 가운데서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날 때, 완전한 빛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기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종들은 자유로워지고 포로들은 구속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모든 식물은 뽑힐 것입니다.” (마태복음 15:13) 분리된 자들은 연합하여 […] 충만해질 것입니다. 신방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빛을 밝힐 것입니다. […] 결혼 생활에서 […] 밤에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불은 밤에만 […] 꺼집니다. 그러나 그 결혼의 신비는 오히려 낮과 빛 속에서 완전해집니다. 그 날도 그 빛도 결코 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신방의 아들이 되면 그는 빛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기 있는 동안 그것을 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빛을 받는 사람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구금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런 사람을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괴롭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이미 이미지 속의 진리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에온(영원한 영역)이 되었습니다. 에온은 그에게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만 계시되고, 어둠과 밤에 숨겨져 있지 않고, 완전한 낮과 거룩한 빛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빌립의 복음